
<장진호>배경 입니다
한국전 최고의격전지 장진호전투를 소개합니다
전술이나 공격과 후퇴방향은 머리가 아둔하여 상세설명이 어렵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장진호 전투를 검색하시어 이해하시길바랍니다
저는 브레이크 아웃으로 읽은 책의내용중에서
겨울전쟁에의 어려움과 혹한 겨울 전장을 그려보겠습니다
자세한 전투의그림은 아래주소로 가셔서 보시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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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미국 최정예 해병 1사단이 전멸의 위기에서 벗어난 장진호 전투는 미군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전투의 하나. 단일 전투에 대통령이 직접 수여한 무공훈장만 17개에 이를 정도였다.
로런스 당시 소령은 6·25전쟁이 발발한 뒤 1950년 9월 15일 미 해병 1사단 제7연대 보병 2대대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장섰던 미 해병 1사단은 전선을 미 8군에 인계한 뒤 인천에서 철수해 10월 말 원산에 상륙했다.
선봉에 선 해병 7연대는 11월 25일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틀 후인 27일 밤 중공군이 대공격을 감행했다. 부대원 절반이 전사했지만 간신히 이를 막아냈다.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 중공군은 특유의 인해전술로 총공세를 펼쳤다. 로런스 소령은 장진호 전투에서 당시 스트레스로 제구실을 못한 대대장과 중상을 당한 부대대장을 대신해 지휘관으로서 2대대를 이끌었다.
해병 1사단이 포위돼 전멸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 전국도 일대 긴장에 휩싸였다. 만주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이 무렵이다.
12월 6일 미 수송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1사단은 차량 1000대를 이용해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극적으로 흥남으로 이동했다. 이때 선봉에 선 부대가 바로 로런스 소령이 이끈 부대.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은 “우리는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치열한 전투로 중공군의 대대적인 남하를 지연시킨 1사단은 12월 15일부터 흥남에서 선박을 동원해 수많은 피란민과 함께 철수했다.

국제 연합 중국 미국 영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올리버 스미스 송쉬룬 병력 미국 1 해병사단 미국 7 보병사단 예하 31 연대전투단(31RCT) 중국 9 병단 피해 상황 전사 - 2,500여 명 전사 - 25,000여 명
실종 - 219명 부상 - 5,000명 부상 - 12,500여 명
동상자 다수
11월27일에 북한의고원지대 특성상 11월말에 이미 눈발이 내리기시작했고 고지대는 눈이쌓여갔습니다
장진호의 추위가 맹위를 떨치기시작한거죠
영하 30도에서 35도가 기본으로 내려가는 혹한속의전투가 장진호전투의최대 어려움입니다
유담리에서 처음 중공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장진호의전투가 시작합니다

<코르세어기>
원산앞바다에서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코르세어기의
근접항공지원과 공지기동 항공단을 보유 화력이 막강한 미해병대와 대조적으로
중공군은 겨울 방한복도 장비도 없이 위장복과 일인 방망이수류탄1발과 4인중 한명만이 총기를 휴대하고
나머지는 인해전술의 상징인 꽹가리 징을 들고있었습니다
총을든사수가 공격당하여 죽으면 다른사람이 그총을들고 전진하는것이
중공군의 인해전술방식이었습니다
화기가 부족한 중공군은 낮은포복으로 미해병대 진지까지 기어와
방망이수류탄을 일제히던지고 그 와동시에
꽹가리와 징을 치며 일어서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전술을 씁니다
그러려면 긴거리를 최대한 기도비닉을 유지하며 포복으로 와야하는데
중공군은 가을에 본토에서 이동하여 초겨울인 장진호에도착했을땐 방한복도없었고 방한화도없었죠
중공군 대부분이 동상에걸렸고 동상과 추위를 견디려고 아편을 씹는 병사들이 많았다고합니다
몸은얼고 아편에취해 미해병대의기관총사격에도 묵묵히 죽어갔고 그래도 좀비의행렬처럼 죽음을향해
끝없이 밀려들었고 미해병대의희생도 늘어갔습니다


<동사한 시신들 >
미해병들은 가끔 기이한물체가있거나 없었던 바위같은게 생기면
습관적으로 m1소총을쏴야했는데 이유는 어느순간 중공군이 코앞까지 다가오는것을 간파해야했고
늦게발견하는 전방 부대는 즉시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중공군이 진지근처까지오면 방망이수류탄이 진지안으로 무수히 날아왔고 그것을
해병들은 다시주어서 중공군에게던지고 다시 중공군이주어서
해병대에게던지는 서로 죽음을 피하기위한 웃지못하는 사투가 벌어지기도합니다
너무나 강한추위에 수류탄이 폭발하지 않는것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수류탄을 잡은손에서 터지기도하고 전우를위해 몸으로 수류탄의압력을 받아내는
해병대특유의 감투정신이 빛났습니다


<톰슨기관총>
진지방어에서 가장 수훈이높은 화기는 기관총이었습니다
중공군은 치밀하게도 미해병대 기관총진지를 찿기위해 무기도없이 달려만오는 희생도 감수 했습니다
발사속도가 느린 m1으로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중공군을 저지하기 힘들었고 기관총이나 톰슨기관총이 제일중요했습니다
기관총이 고장나거나 기관총이 추위에 얼어 사용못하면 그 부대는 괴멸을 면치못해서
가끔씩 움직여야 동결을 막을수있었고 중공군은 m1소총소리와 기관총소리로 위치를 파악하여
기관총진지를 와해하기위해 집요하게 기관총 진지만을 노렸습니다
그래서 기관총진지를 노출시키지않기위해 해병대는 기관총진지를 수시로 옮겨야했습니다

그런데 톰슨기관총은 추위에약해 노리쇠뭉치가 총과 한덩이로 얼어버리는 일이
자주 발생하여 자동차부동액을 부어서 동결을 막으려했지만 부동액도 얼려버리는
장진호의겨울은 어려움의연속입니다
해병대원들은 톰슨기관총을 분해하여 노리쇠뭉치를 품속에 넣고있다가 전투가 임박하면 조립하여 사용하였고
그때까지 m1으로 의심지역은 한발씩 총알세례를 퍼부어 위장접근을 막았습니다
장진호의추위는 인간이 상상할수있는 추위의 한계를 넘어서 총에맞아도 아픈줄을모르고
고통없이 죽어가는 병사들은 피를 쏟으면 그대로 얼어버리고 핏물은 젤리같다가 그마저 얼고 눈속에 파묻혔습니다
동상에걸린팔다리는 마취제도 필요없이 톱으로 잘르고 드럼통에 휘발유를 붓고 태워졌다니
추위와동상이 얼마나 끔직했는지를 상상하기 힘드실겁니다
중공군은 누비솜옷 방한복 지급이 늦어지자 싸움은커녕 항복하는 병사들도 많았고
전투없이 항복하는 중공군들이 많았습니다
일부병사는 군화조차 없는 병사도있었지만 동상에걸려 자신이 군화를 신었는지
안신었는지 몰랐다고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동상으로 죽었습니다

<자진항복한 중공군>
혹독한취의는 인간의이성을 마비시켜 전투보다는 추위를피하기위해
중공군은 불을피웠고 그 불에 불나방이 모여들듯이 중공군이 몰려들었고 간부들조차 불을쬐기위해
제지를 못하였고 그렇게 불이피어있는 지역은 미해병항공기의 네이팜탄 폭격의 표적이 됩니다

<베트남전 네이팜탄 폭격>
누비솜옷 방한복을 지급받은후 중공군위에 네이팜탄이 폭발하면 누비솜옷에 네이팜이묻어
죽은 중공군 시체가 밤새타는 고약한 냄새를 맡아야했고 지옥이 따로없었습니다
해병대 진지가 유린당하면 해병들은 자신의전우 시신을 수습하기위해 다시 전투를 벌였고
은폐가 어렵고 바위나 땅이얼어 진지를 파지못하면 주위의시체를 끌어모아
시체진지를 만들어 싸우면서
전우의시신은 반드시 되가져오려했습니다
그마저도 너무나 많은 상상할수조차없이 몰려오는 중공군 인해전술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때에는
해병대특유의악에받쳐 주체를 못하는 대원도있었습니다
전우의시신을 수습하다 오히려 희생돼는 대원이 늘자 스미스 사단장은 심각한 병력부족을 우려해
나중을 기약하며 시신수습을 하지말라 명령을 내리기까지했습니다
해병대는 전우를 버리지않는다 그 유명한 말은 전통이 됩니다
아무리 악조건이어도 전우의시신은 반드시 챙기려하였습니다


<해병대의 시신수습 >
얼어붙은 장진호주변을 해병대와 미육군7사단 병력이 풍선처럼 타원형으로 둘러싸면서 방어와 후퇴를 하였고
중공군의 4중5중의 포위망을 뚫어야했습니다
10배가 넘는 중공군은 3진으로 나누고 미해병대를 괴멸시키려 보자기를 감싸듯 쉴새없이 24시간 공격을 합니다
미육군7사단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추위와 피로에지쳐 전투도 제대로못하고 적의공격에 희생돼었고
모든방어와전투는 대부분 해병들이 맡아야했습니다
산기슭에서 공격하는 중공군을 바깥쪽 해병대가 맡고 장진호 안쪽으로육군7사단을
보호하면서 행군을 합니다

<좌측 해병대 우측 미육군 7사단 >
미해병대도 전통과 규모면에서 육군보다 작아 보급과장비가 안좋았고 좋은장비를 가진 미육군7사단병사들과해병들이 무기를 바꾸는 일이 많았습니다
잘싸우는 군대가 생존을 보장할수있었으니 육군들이 무기까지 양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해병대원의 전투력과 정신력이 남달랐습니다

후퇴방향까지 중공군에게 막히자 8군 사령관 워커는 항공기 후퇴를 종용하지만
해병대 스미스 사단장은 거절하며
무슨소리야 후퇴라니 우린 다른방향으로 공격중이야 해병대에 후퇴란없어
라는 유명한말을 남깁니다
비행기로 철수하면 빠르겠지만 마지막까지 비행장을 사수하는대원들은 안전을 보장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결론으로
우린 살아도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죽는다 우린 해병이니까 하며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위대한 해병정신을 발휘합니다




해병공병대는 얼어붙은 장진호 하갈우리에 야전비행장 활주로를 개설하면서
공사를하다가도 방어진지가뚫려 비행장쪽으로 중공군이 난입하면 총을들고 전투를 벌이다가
소강상태에 들어가면 다시 활주로를 만들고 다시위기에빠지면 다시전투를하는등
해병대는 행정 취사 공병이 따로없었습니다
생존하려면 직급과 관계없이 전투를 치뤄야했고 해병이면 누구나 싸워야했습니다
사단장까지 전투를하는 극박한상황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공병은 간이 제재소를 차려놓고 주변에서 나무를 잘라와 목재를 만들고 다리보수 교량건설을하며
해병대의 보급과 진출로로를 만듭니다
유담리부터 흥남부두까지 56km의 보급과 행군로는 생명의선이었습니다
그것을 해병공병대가 담당했습니다

<해병대 서울탄환작전>
35도의추위는 인간의 모든 의지를 빼앗아 중공군은 땅굴을 파고들어 추위를 피했고
땅굴하나에서 6~7명의중공군동사체가매일 발견돼는건 흔한일이었습니다
모택동의장남이 장진호전투에서 죽은일도 땅굴속에서의동사였습니다
그처럼 강한추위 10배가넘는 중공군을 막아내며 지상으로 후퇴를 거듭하는 이유중하나가
한국군의후퇴와 10만명의 한국인 피난민도있었습니다

이피난민과 아군을 구해내기위해 군인정신중 최고 의뜸이라할수있는 감투정신을
여실희보여주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지켜내려한다는 확고한 신념이있으면
죽음이 앞에 닫쳐도 두렵지않고 어떠한일도 가능하게 합니다


흥남철수는 단일규모로 최대의철수였고 흥남에서 거제도까지 오는동안 10만
피난민중에서 5명의아이들이 태어날정도였다고합니다
철수작전과 피난중 분만 모두 기네스북에 등재돼었습니다

그렇게 악조건에서 흥남까지 다른방향으로 공격하여 해병대는 괴멸에가까운 피해를보며
탈출에 성공합니다
해병대의전술승리였고 기적이었습니다

<흥남철수 부두 폭파>
해병대의 감투정신에 빛나는 군인정신의 승리였습니다
일부에선 해병대 최대의 패배라 혹평하지만 10배에달하는 중공군에 섬멸돼지않고
그 군세를 유지했으며 10만아군과 10만 피난민을 지켜낸 해병대의감투정신의 승리라고
저는 자신있게 말할수있습니다

해병대 신화 장진호전투는 화력보다도 정신무장이잘돼어있는
해병대의 일면을 보여준 일이었고 수많은 회고록은 한국 미군참전 배경으로 쓰였으며
해병대 교육용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리고 서적에서는
브레이크 아웃 이라는 책에서 가장 참혹했던 장진호전투를 잘 그려줍니다
좀 두텁습니다 500페이지의 두터운책은 한달여 탐독의시간을 줍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영화사가 만드는 코리아 워 가 장진호를 배경하였고
2012년에 개봉예정입니다
한국전최대의격전지 장진호전투는 우리에게 많은것을 시사해줍니다
우리가 무엇을해야할지 또 전쟁의 참혹함 겨울전쟁의 혹독함 그속에서도
지켜야할 그 소중한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감투정신은 후세에도
큰 교훈으로 남을겁입니다

<용산전쟁기념관 장진호전투 >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진호 전투였습니다 |